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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샤라타 마우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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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샤라타 마우리아는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아소카의 손자이자 일반적으로 아소카의 뒤를 이은 통치자였다. 그는 아소카의 종교 정책을 이어받아 아지비카교에 나가르주니 언덕에 있는 석굴을 헌납했다.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은 분열되었으며, 다샤라타는 마가다에서 제국의 권력을 유지했으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지역들이 독립했다. 다샤라타는 기원전 22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뒤를 이어 형제 삼프라티가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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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샤라타 마우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다샤라타 마우리아
로마자 표기Daśaratha Maurya
칭호데바남피야
차크라바르틴
통치
재위기원전 232년 ~ 기원전 224년 (추정)
왕조마우리아
계승 순서4대 마우리아 황제
종교불교
전임자아소카
후임자삼프라티
생애
출생기원전 252년 (추정)
출생지마우리아 제국 파탈리푸트라 (현재의 인도 비하르 주)
사망기원전 224년 (추정, 28세)
사망지마우리아 제국 파탈리푸트라 (현재의 인도 비하르 주)
가족
아버지(정보 없음)
어머니(정보 없음)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정보 없음)

2. 생애

다샤라타는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의 손자였다.[12] 일반적으로 다샤라타는 아소카로부터 마우리아 제국의 제위를 계승받은 것으로 간주되나, 일부 문헌에서는 아소카 이후 마우리아 황제에 대해 다른 이름과 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역사가 빈센트 스미스와 로밀라 타파르는 아소카의 죽음 이후 쿠날라와 다샤라타 사이에 마우리아 제국이 분열되었다는 대중적인 이론을 제시했다.[14] 일부 문헌에서는 제국이 삼프라티와 다샤라타 사이에 분열되었으며, 다샤라타는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하는 동부 제국을, 삼프라티는 우자인을 수도로 하는 서부 제국을 보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그러나 스미스는 이 가설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도 썼다.[16]

바유 푸라나와 브라흐만다 푸라나에서는 반두팔리타, 인드라팔리타, 다소나 등 세 명의 마우리아 통치자가 언급되는데,[17] 이들이 다샤라타가 행정 편의를 위해 임명한 지역 총독이었을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다샤라타는 기원전 224년에 사망하였으며, 삼프라티가 마우리아 황제 자리를 계승하였다.[23]

2. 1. 출생과 가계

다샤라타는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의 손자였다.[12] 비록 바유 푸라나를 포함한 일부 문헌에서 아소카 이후 마우리아 황제의 이름과 수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샤라타는 아소카의 뒤를 이어 마우리아 제국의 제위를 계승한 것으로 여겨진다.[12] 아소카의 손자들 중에서는 삼프라티와 다샤라타가 가장 자주 언급된다.[13] 비슈누 푸라나에서는 다샤라타가 수야샤스(아소카의 아들)의 아들이자 제국의 후계자로 묘사되고 있는데, 수야샤스는 아소카의 아들 쿠날라의 다른 이름이라는 가설이 있다.

역사가 빈센트 스미스와 로밀라 타파르는 아소카 사후 쿠날라와 다샤라타 사이에 마우리아 제국이 분열되었다는 대중적인 이론을 제시했다.[14]

2. 2. 즉위와 통치

다샤라타는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의 손자였다.[12] 일반적으로 다샤라타는 아소카에게서 마우리아 제국의 제위를 계승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아소카의 손자 중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두 사람은 삼프라티와 다샤라타이다.[13]

역사가 빈센트 스미스와 로밀라 타파르는 아소카의 죽음 이후 쿠날라와 다샤라타 사이에 마우리아 제국이 분열되었다는 대중적인 이론을 제시했다.[14] 그러나 스미스는 이 가설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도 썼다.[16]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의 정치적 통일성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18] 다샤라타의 삼촌 중 하나인 잘랄루카는 카슈미르에 독립 왕국을 세웠다. 타라나타에 따르면, 다른 마우리아 왕자 비라 세나는 자신을 간다라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비다르바도 분리되었다. 그리스 출처의 증거는 북서부 지방의 상실을 확인시켜 주며, 이 지역은 당시 소파가세누스(수바가세나, 아마도 비라세나의 후계자)가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샤라타와 또 다른 마우리아 통치자가 관련된 제국의 동서 분열 가능성에 대한 많은 현대적 가설이 존재한다.[19] 금석학적 증거는 다샤라타가 마가다에서 제국의 권력을 유지했음을 나타낸다.[20] 그는 약한 군주였으며 유능한 군사 지도자는 아니었다.

사타바하나를 포함한 남인도의 다양한 왕조들은 마우리아 제국의 봉신국이었다. 이 왕국들은 아소카의 칙령(기원전 256년)에 언급되어 있으며, 마우리아 황제의 통치에 종속된 제국의 변경 일부로 간주되었다.[21] 아소카의 죽음은 남부의 제국 권력 쇠퇴를 유발했다. 다샤라타는 고향의 일부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남부 지역을 포함한 먼 정부는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인도 중동부에 있는 칼링가마하메가바하나 왕조 역시 아소카가 사망한 후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다.

자이나교 문헌에 따르면, 사우라슈트라, 마하라슈트라, 안드라, 마이소르 지역은 아소카가 사망한 직후 제국에서 분리되었지만 다샤라타의 후계자 삼프라티(자이나교 수도사로 위장한 병사를 배치한 것으로 추정됨)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22]

다샤라타는 기원전 224년에 죽었고 그의 형제 삼프라티가 마우리아 황제 자리를 계승하였다.[23]

3. 마우리아 제국의 분열과 쇠퇴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샤라타는 제국의 권력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여러 지역에서 독립 움직임이 나타났다. 비록 다샤라타는 약한 군주였고 유능한 군사 지도자는 아니었지만,[20] 마가다 지역에서는 제국의 권위를 유지했다.[20] 다샤라타는 기원전 22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형제(혹은 손자)인 삼프라티가 제위를 계승했다.[23]

3. 1. 제국의 분열

역사가 빈센트 스미스와 로밀라 타파르는 아쇼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이 쿠날라와 다샤라타에 의해 분할되었다는 통설을 제시했다.[3] 일부 자료에서는 분할이 삼프라티와 다샤라타 사이에서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자는 수도를 파탈리푸트라에 두고 동부 지역을, 전자는 수도를 우자이에 두고 서부 제국을 지배했다고 한다.[4] 그러나 스미스는 "이 가설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썼다.[5]

바유 푸라나와 브라흐만다 푸라나는 반두팔리타, 인드라팔리타, 다소나 등 마우리아 통치자 3명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의 신원을 확인하기는 매우 어렵다.[2] 이들은 다샤라타가 행정 편의를 위해 총독으로 임명한 마우리아 왕조의 방계 일원이었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

마우리아 제국의 정치적 통일은 아쇼카 사후 오래가지 못했다.[2] 다샤라타의 삼촌 중 한 명인 잘라우카는 카슈미르에 독립 왕국을 세웠고, 타라나타에 따르면, 또 다른 마우리아 왕자인 비라세나는 간다라에서 스스로 왕이라고 선언했다.[2] 비다르바 역시 독립했다. 그리스 자료의 증거에 따르면 당시 마우리아 통치자 소파가세누스(수바가세나, 아마도 비라세나의 후계자)가 통치했던 북서부 지역의 상실이 확인되었다.[2] 다샤라타와 또 다른 마우리아 통치자를 포함하는 제국의 동서 분할 가능성에 대한 현대의 추측도 많다.[3] 비문 증거에 따르면 다샤라타는 마가다에서 제국 권력을 유지했다.[6]

남부의 다양한 왕조(사타바하나 포함)는 마우리아 제국의 봉신이었다. 이 왕국들은 아쇼카의 칙령(기원전 256년)에 언급되었으며, 제국의 외곽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비록 그들의 지역 통치 하에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을지라도 마우리아 황제의 통치를 받았다.[5] 아쇼카의 죽음은 남부에서 제국 권력의 쇠퇴를 시작했다. 다샤라타는 본토의 일부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남부 지역을 포함한 원격 정부는 제국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재확립했다.[5] 중앙 동부 인도에 위치한 칼링가의 마하메가바하나 왕조 역시 아쇼카 사후 제국 통치에서 벗어났다.[5]

자이나교 문서에 따르면, 사우라슈트라, 마하라슈트라, 안드라 및 마이소르 주는 아쇼카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서 이탈했지만, 다샤라타의 후계자인 삼프라티에 의해 재정복되었다(그는 자이나교 승려로 위장한 군인들을 배치했다고 한다).[7]

3. 2. 지역들의 독립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의 정치적 통일성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18] 다샤라타의 삼촌 중 한 명인 잘랄루카는 카슈미르에 독립 왕국을 세웠다. 타라나타에 따르면, 다른 마우리아 왕자 비라 세나는 자신을 간다라의 왕으로 선언하였다. 비다르바도 분리되었다. 그리스 출처의 증거는 북서부 지방의 상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이 지역은 당시 소파가세누스(수바가세나, 아마도 비라 세나의 후계자)가 통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샤라타와 또 다른 마우리아 통치자가 관련된 제국의 동서 분열 가능성에 대한 많은 현대적 가설이 존재한다.[19] 금석학적 증거는 다샤라타가 마가다에서 제국의 권력을 유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20]

남인도의 다양한 왕조들은 마우리아 제국의 봉신국이었다. 이 왕국은 아소카의 칙령(기원전 256년)에 언급되어 있으며, 마우리아 황제의 통치에 종속된 제국의 변경 일부로 간주되었다.[21] 아소카의 죽음은 남부의 제국 권력의 쇠퇴를 유발시켰다. 다샤라타는 고향의 일부 지휘권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남부 지역을 포함한 먼 정부는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하기 시작하였다. 인도 중동부에 있는 칼링가마하메가바하나 왕조 역시 아소카가 사망한 후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났다.[21]

자이나교 문헌에 따르면, 사우라슈트라, 마하라슈트라, 안드라, 마이소르 지역은 아소카가 사망한 직후 제국에서 분리되었지만 다샤라타의 후계자 삼프라티(자이나교 수도사로 위장한 병사를 배치한 것으로 추정됨)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22]

4. 종교 정책

아소카는 그의 비문에서 신의 지지를 보여주었으며, 비록 불교 통치자였지만 팔리어로 "신들의 사랑"을 의미하는 데바남피야라고 불렸다.[24] 마우리아 황제의 데바남피야 칭호와 불교에 대한 종교적 고착은 다샤라타에 의해 계속되었다.[25] 다샤라타는 나가르주니 석굴에 아지비카교에 헌납한 세 개의 석굴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석굴의 비문에는 그를 "데바남피야"라고 칭하며 즉위 직후 헌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6]

4. 1. 아지비카교 후원

다샤라타 마우리아가 건설하고 헌납한 광택이 나는 화강암 벽으로 이루어진 고피카 동굴 입구 복도


아소카는 그의 비문에서 신의 지지를 보여주었으며, 비록 불교 통치자였지만, 팔리어로 "신의 사랑을 받는 자"를 의미하는 데바남피야라고 불렸다.[8] 마우리아 통치자의 데바남피야라는 칭호와 불교에 대한 종교적 헌신은 다샤라타에 의해 이어졌다.[8][9]

다샤라타는 나가르주니 언덕에 있는 세 개의 동굴을 아지비카교에 헌정했다고 알려져 있다. 동굴에 있는 세 개의 비문은 그를 "데바남피야"라고 칭하며, 그의 즉위 직후에 그가 동굴을 헌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10]

4. 2. 나가르주니 석굴 비문

아소카의 손자이자 계승자인 다샤라타 마우리아는 나가르주니 석굴에 세 개의 비문을 남겼다.[27] 이 비문들은 그를 "데바남피야"(신들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칭하며, 즉위 직후 이 석굴들을 아지비카교에 헌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6]

바다티카 동굴 입구 위의 다사라타 마우리아에 대한 헌납 비문


세 개의 석굴은 다샤라타가 황제로 즉위할 때 아지비카교에게 헌납되었으며, 이는 기원전 230년경에 여전히 아지비카교의 교세가 활발했던 동시에 불교가 당시 마우리아의 국교가 아님을 확인시켜준다.[28] 또한, 석굴 내부 화강암 벽의 세련된 마감은 마우리아의 기술이 아소카의 치세와 함께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29]

다사라타(아소카의 손자)의 나가르주니 석굴 비문
한글 번역브라흐미 문자로 쓰여진 프라크리트어 원문
고피카 석굴 비문 : "고피카 석굴은 해와 달이 지속될 수 있는 피난처이며, 데바남피야(신들의 사랑을 받는) 다샤라타가 그의 높이에서 왕좌에 이르기까지 가장 경건한 아지비카교도의 은신처로 만들었습니다."[13]--|]]



5. 다샤라타의 죽음과 계승

아소카의 손자인 다샤라타는 일반적으로 아소카의 뒤를 이어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12] 아소카의 손자 중에서는 삼프라티와 다샤라타가 자주 언급된다.[13] 비슈누 푸라나에서는 다샤라타가 수야샤스(아소카의 아들)의 아들이자 제국의 후계자로 묘사되는데, 수야샤스는 아소카의 아들 쿠날라의 다른 이름이라는 가설이 있다.

역사가 빈센트 스미스와 로밀라 타파르는 아소카 사후 쿠날라와 다샤라타 사이에 마우리아 제국이 분열되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4] 일부 문헌에서는 제국이 삼프라티와 다샤라타로 나뉘어, 다샤라타는 파탈리푸트라를 수도로 하는 동부 제국을, 삼프라티는 우자인을 수도로 하는 서부 제국을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다.[15] 그러나 스미스는 이 가설을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도 했다.[16]

아소카 사후 마우리아 제국의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18] 다샤라타의 삼촌 잘랄루카는 카슈미르에 독립 왕국을 세웠고, 타라나타에 따르면 비라 세나는 간다라의 왕이 되었다. 비다라바도 분리되었으며, 그리스 측 기록에 따르면 북서부 지방도 상실했다.[19] 다샤라타는 마가다에서 제국의 권력을 유지했지만,[20] 약한 군주였다.

사타바하나를 비롯한 남인도 왕조들은 마우리아 제국의 봉신이었으나,[21] 아소카 사후 남부의 제국 권력은 쇠퇴했다. 다샤라타는 고향의 일부 지휘권은 유지했지만, 남부 지역은 제국에서 독립했다. 칼링가마하메가바하나 왕조도 아소카 사후 독립했다.

자이나교 문헌에 따르면, 사우라슈트라, 마하라슈트라, 안드라, 마이소르 지역은 아소카 사후 제국에서 분리되었지만, 다샤라타의 후계자 삼프라티에 의해 다시 정복되었다.[22]

다샤라타는 기원전 224년에 사망했고, 그의 형제[2] 삼프라티가 마우리아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2] 삼프라티는 힌두교 푸라나에서는 다샤라타의 손자로, 불교 및 자이나교 문헌에서는 쿠날라의 아들, 즉 다샤라타의 형제로 간주된다.[23]

참조

[1] 서적 Material Life of Northern India: Based on an Archaeological Study, 3rd Century B.C. to 1st Century B.C. Mittal Publications
[2] 서적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New Age International
[3] 서적 Studies in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Shiva Lal Agarwala
[4] 서적 History Of Ancient India.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5] 서적 The Early History of India Atlantic Publishers & Dist
[6] 서적 The History of India The Rosen Publishing Group
[7] 서적 Trade and Trade Routes in Ancient India https://books.google[...] Abhinav Publications
[8] 서적 Perspectives in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early India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9] 서적 Studies in the Buddhistic Culture of India During the 7th and 8th Centuries A.D.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0] 서적 Aśoka and the Decline of the Maurya Oxford University Press
[11] 서적 Buddhist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12] 서적 Material Life of Northern India: Based on an Archaeological Study, 3rd Century B.C. to 1st Century B.C. Mittal Publications
[13] 서적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New Age International
[14] 서적 Studies in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Shiva Lal Agarwala
[15] 서적 History Of Ancient India.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16] 서적 The Early History of India Atlantic Publishers & Dist
[17] 서적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New Age International
[18] 서적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New Age International
[19] 서적 Studies in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Shiva Lal Agarwala
[20] 서적 The History of India The Rosen Publishing Group
[21] 서적 The Early History of India Atlantic Publishers & Dist
[22] 서적 Trade and Trade Routes in Ancient India https://books.google[...] Abhinav Publications
[23] 서적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New Age International
[24] 서적 Perspectives in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early India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25] 서적 Studies in the Buddhistic Culture of India During the 7th and 8th Centuries A.D.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26] 서적 Aśoka and the Decline of the Maurya Oxford University Press
[27] 서적 Buddhist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28] 서적 Buddhist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29] 서적 Buddhist Architecture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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